남편 김대중 대통령까지 바꾼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 여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임병도 | 기사입력 2019/06/11 [22:30]

남편 김대중 대통령까지 바꾼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 여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임병도 | 입력 : 2019/06/11 [22:30]

 

 
 

 

 

그녀가 결혼할 때 모두가 말렸습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안 된다고 그녀를 설득했고, 선배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 신부는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 지식인으로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주목받는 미래가 밝은 ‘이희호’였습니다. 서른여덟 살 신랑은 정치 낭인으로 두 아이에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여동생까지 딸린 빈털터리 홀아비 ‘김대중’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희호의 외삼촌 이원순의 한옥집 대청마루에서 진행됐습니다. 빈손이었던 신랑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신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신랑이 얼마나 돈이 없었던지, 결혼 반지도 신부였던 이희호가 준비했습니다.

 

결혼식에 모인 이희호의 하객은 가족과 YWCA 선후배 100여 명나 됐지만, 김대중의 하객은 두 동생을 비롯해 몇 명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이희호는 빈손뿐인 김대중과 1962년 5월 10일 결혼을 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김대중)

 

사람들이 왜 김대중과 결혼했느냐고 질문하자 이희호는 “잘생겼잖아요”라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이희호는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 이름을 문패에 달았던 남편

 

▲1963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세였던 동교동 작은 주택을 구입하면서 아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함께 달았다. 사진은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부모를 대신해 동교동을 지켰던 장남 김홍일까지 걸려 있던 문패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자란 모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토머스 모어’라는 세례명이 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보통 결혼하면 남편의 종교를 따라가는 당시 풍습과 다르게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로 평생 살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혼 후 문패를 만들면서 ‘이희호’ 여사의 이름도 함께 달았습니다. 가부장적 의식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를 가리켜 ‘동지’처럼 대했고, 항상 서로가 존댓말을 사용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부속물처럼 취급받던 시대에서는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한 번도 남편에게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의 별명은 ‘다스’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의 1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닐 때 이희호 여사의 별명은 독일어에서 중성 관사를 뜻하는 ‘다스'(das)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빠르고 행동도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그녀를 ‘다스’라고 불렀습니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또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음료수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이희호 여사)

▲1959년 이희호 여사가 활동했던 YWCA의 첫 캠페이은 ‘혼인신고 합시다’였다.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축접자에 투표하지 말라’는 피켓을 든 축첩반대 시위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준비했던 이희호 여사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부산 피란 생활 중에 이희호 여사는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참여했지만, 군 위문 공연 활동에 치우치자, 1년 만에 나왔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1952년 여성계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조직했고, 나중에는 남녀차별 철폐운동을 통해 가족법 개정까지 이끌어 내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호주제 폐지까지 이어진 여성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 미국 램버스 대학과 스캐리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까지 밟고 돌아온 이희호 여사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 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이희호 여사가 벌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습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뒤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면서 쫓겨난 조강지처가 많았습니다. 법적인 일부일처제를 현실화시켜 여성을 보호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활동했던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는 국회의원 선거 때는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라며 지금의 낙선 운동까지 벌였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여성 운동 방식과 현실을 꿰뚫는 통찰력을 본다면,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 부인이 아니었어도 여성운동가로 충분히 성공했을 겁니다.

 

김대중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타도하겠다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 후보 부인으로는 처음 찬조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71년 대전 유세에서 찬조 연설을 하는 이희호 여사 ⓒ동아일보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희호 여사는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습니다. 당시 이희호 여사의 찬조 연설은 대통령 후보 부인으로는 최초였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무조건 남편을 찍어달라는 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며 대통령 남편을 감시하는 부인이 되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22만명이나 많은 여성들의 주권 행사에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라며 여성 유권자들이 나서서 투표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희호 여사를 김대중 대통령의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희호 여사의 삶은 단순히 영부인이라는 말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여성과 인권이었습니다. 차별받는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그녀는 정치인 김대중을 선택해 꿈을 이루도록 도와줬고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을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노력했습니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일상화된 사회입니다. 이 단어들의 핵심은 ‘여성 인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평생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 길을 걸어왔던 이희호 여사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가 2019년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습니다.

 

오늘은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보다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평생 살아온 여성 운동가로 그녀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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