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故 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이야기 - 2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안홍용 | 기사입력 2019/06/23 [21:40]

[연재] 故 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이야기 - 2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안홍용 | 입력 : 2019/06/23 [21:40]

 

 

2020년이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故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그는 ‘공격 진압보다 방어 진압을 우선하라’ ‘가혹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故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씨의 비망록 이야기를 기획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비망록에 보면 故 안병하 치안감은 5월24일까지 전남경찰국장으로 근무했다고 쓰여져 있다. 상황일지에는 26일 광주에서 보안사에 압송되어 서울보안사에 구금되었다고 되어 있다.

 

23, 24일경에 광주시내 모경찰서에서 무장한 시민군이 경찰서를 지켜주는 가운데, 아버님과 일부 경찰관이 그 곳에서 무엇인가 일들을 하였다고 한다. 24일 부터 안국장은 보안사의 감시하에 있어 어떤 일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부 경찰은 시민군에게 접수된 경찰국에서 시민군의 도움으로 중요한 점검을 하였다고 한다. 광주에서 시민들이 광주시내의 정상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22일 이후에 경찰이 시민군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업무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점 광주에 있던 다른 정부 기관은 어떠 했을까?

 

80년 5월 17일에는 광주가 타 도시에 비해 평온하다고 기록했다. 5월 16일에는 광주에서 5.16을 성토하는 야간 횃불 시위가 도심에서 열렸는데 광주권 전 대학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였다. 그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라 시위는 금지 되었다. 그러나 전남대학 박관현 학생회장이 안국장과 만나 비밀회담을 하였다. 안국장을 설득한 것이다. 안국장은 망설였다고 한다.

 

주간 시위 한다고 해도 불허해야 하는데 악간 횃불 시위를 요구하였으니..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인터뷰한 나의갑 5.18 기록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박관현 학생회장의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그의 눈빛을 보고 허가하였다고 한다. 물론 상부에는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참모들과 상의하여 독단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안국장과 전남경찰관은 만약에 발생할 상태에 대비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시위대는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위대 중간 중간에 자체 질서 유지 학생을 투입하였고, 경찰은 시위를 막지 않고 앞뒤에서 학생들을 보호만 하였다.

 

늦은 시간 도청앞에서 야간 횃불시위 해산식을 마친 학생들은 즉석 성금을 걷어 경찰들에게 감사의 보답으로 음료수와 빵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반정부 구호 보다는 경찰관 월급 인상하라는 구호를 하였다고 한다.

17일부터는 학생들이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 오랜만에 전남경찰관들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부친 역시 10여 일 만에 5분 거리에 있는 관사에 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어머니에게 이제는 아무 걱정 말라고 하셨다 한다. 기록에 보면 많은 경찰관이 오랜만에 귀가할 수 있었고 일부 기동 중대는 야유회를 떠났다.

 

인근에서 지원 나온 많은 경찰관 중 일부는 본대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 정도로 광주는 전국 어디보다 평온하였다. 기록에 보면 광주 인근에서 특전사들이 숙영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한다.

 

 

5월 17일 24시에 계엄령이 전국계엄으로 확대 되어도 전남경찰관들은 흔들림없이 본분에만 최선을 다했다. 계엄군이 시위 진압에 나선 후부터 학생 위주의 시위가 일반시민이 합류하게 되었다.

 

18일 부터 시위 진압에 나선 계엄군들의 만행을 시민들이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필요 이상의 과격 시위 진압하는 계엄군을 말리고 나무라던 시민들에게 계엄군은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

 

이를 지켜본 경찰관들도 계엄군에게 항의도 하고 말려 보았다. 경찰들은 시위 진압에 대해서는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위 진압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보지 않았던 계엄군들은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잔혹하게 두들겨 패기만 하였다.

 

나는 많은 의문점이 생겼다.

 

1. 왜 계엄군은 시위 진압 전문가인 경찰의 자문도 없이 자기들 방식대로 마구잡이 시위 진압을 했을까?
2. 17일부터 학생 시위가 사라진 광주에 왜 특전사를 집중배치 했을까?
3. 왜 학생들을 흥분 시켰을까? 왜 시민들을 흥분 시켰을까?
4. 왜 시위 중 연행된 시위대를 특전사가 자기들 숙영지 등으로 연행 했을까?

 

모든 것이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군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어떠한 매뉴얼에 따라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안호재 / 故 안병하 치안감 아들

【안병하 치안감 프로필】

○ 1928년 강원도 양양 출신
○ 육사8기 김종필 김형욱 강창성 윤필용 유학성 이희성 등과 동기
○ 한국전쟁 당시 포병 중위 시절 춘천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으로 화랑무공훈장 수훈.
○ 1962년 총경으로 경찰 투신
○ 부산중부경찰서장
○ 1968년 서귀포 간첩사건 육상작전 지휘, 중앙정보부장 표창 수상.
○ 화랑무공훈장 2개, 녹조근정훈장 3개 수훈.
○ 1971년 43세의 나이로 경무관 승진
○ 치안국 방위과장, 소방과장, 강원도경국장, 경기도경국장
○ 1979년 2월 운명의 전남도경국장 부임
○ 1980년 전남경찰기동대 안전수칙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학교 안으로는 진입하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잡혀온 시민들에게도 식사를 정상적으로 지급하고 가혹행위하지 마라.” 라고 특별지시를 내리는 등,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 1980년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 앞에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발포명령 거부.
● 1980년 5월 26일 전남도경국장 직위해제 및 보안사 연행 후 8일 동안 혹독한 고문.
● 1988년 10월 10일 고문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 중 어느 내과병원에서 별세.
○ 2003년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선정
○ 2005년 국립 현충원 안장
○ 2006년 순직 인정
○ 2015년 8월 이달의 호국인물 선정
○ 2017년 11월 22일 경찰영웅 선정 및 전남경찰청사 흉상 제막
○ 2017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 추서
○ 2018년 국립현충원에서 치안감 추서식 거행

故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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