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보다 일제 불매운동이 훨씬 쉬운 이유!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일제 불매운동은 한다

임병도 | 기사입력 2019/08/07 [11:41]

독립운동보다 일제 불매운동이 훨씬 쉬운 이유!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일제 불매운동은 한다

임병도 | 입력 : 2019/08/07 [11:41]

 

 

일본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일제 불매운동,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일제 불매운동은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극히 일부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송장 아니면 산송장이 되어 나왔던 종로경찰서 

 

일제강점기 시대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종로경찰서가 자주 등장합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지독하게 탄압했는데 한 번 끌려가면 멀쩡하게 돌아올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의 대명사였습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을 했는지, 송장 아니면 산송장으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가슴에 수많은 훈장을 매달고 사진을 찍은 고등계 주임 미와 경부(오른쪽 아래). 그는 고문과 탄압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으며 ‘염라대왕’이라 불렸다. ❷ 김상옥이 고봉근의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체포하려다 김상옥이 쏜 총에 맞고 즉사한 다무라 순사부장(왼쪽 위) ⓒ민족문제연구소

 

 

이 사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입니다. 이 사진첩에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한 다무라 죠시치 순사부장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그만큼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곳을 폭파시켰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종로경찰서에는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을 고문했던 ‘특별수사대’의 고등계 주임 미와가 있었습니다. 한용운, 박헌영, 김구, 김좌진, 윤동주, 안창호, 김원봉, 안중근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한 번쯤은 고문을 당했을 정도로 유명한 고문 경찰관입니다.

 

▲미와 경부의 고문과 폭행을 고소했던 권오설과 강달영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동아일보

 

 

그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에 연루됐던 권오설, 강달영은 미와 경부를  ‘폭행능학독직죄’로 고소를 합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고문 사실이 확실해 검사국은 수사에 착수했고, 이 사건은 일본에까지 알려집니다.

하지만, 미와 경부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권오설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합니다. 고소했던 강달영 역시 고문으로 정신병을 얻어 6년 만기 출옥 뒤 결국 순국합니다.

 

어린 여학생에게 성고문을 했던 일제 경찰 

 

▲상해판 독립신문의 1919년 9월 27일자 제14호부터 제21호까지 연재된 ‘여학생의 일기’ 중 일부 ⓒ여성신문

 

 

1919년 상해판 독립신문에는 ‘여학생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던 여학생들의 수기가 게재됐습니다.

 

‘종로경찰서에 구인되다. (…중략…) 양각(兩脚)을 박(縛)하여 궤좌케 한 후 문답은 의례히 타협(打頰)과 타면(唾面)하는 등 심지어 ‘매음여귀(賣淫女鬼) 회임처녀(懷姙處女)라는 등 온갖 욕설 패담을 거침없이 하다. 유방을 노출하라는 명령을 불응하매 피등은 나의 상의를 열파(裂破)하고 인구(人口)로는 인언(忍言)치 못할 언사로 조롱하다.

다수한 남자 중에서 아등 십여 명 여자를 탈의케 하고 신문(訊問)할 새 아등의 죄목은 다만 길에서 만세를 호(呼)한 것뿐이라.

처음 수감되어서 무수하게 매를 맞고 그 수에는 발가벗겨져 알몸으로 손발이 묶인 채 마굿간에 버려졌다. ..왜놈들은 예쁜 여학생 몇 명을 몰래 잡아가서 윤간하고는 새벽에 다시 끌고 왔다. 눈은 복숭아같이 퉁퉁 붓고 사지는 옭아 맨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제 경찰은 3.1 운동 때 그저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 만으로 여학생들의 옷을 벗겨 고문을 하고, 윤간을 했습니다. 당시 윤리 관념에 비쳐 볼 때 여학생의 일기는 사회적인 매장까지도 각오하고 썼던 피를 토하는 고발이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2조원의 전 재산을 바치고 굶어 죽은 독립운동가 

 

 

▲현 시가 2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내놓은 이회영 일가. 그러나 그들의 가족은 가난과 궁핍으로 고통 받았다. ⓒkbs 화면 캡처

 

 

한일병탄이 발표되자 우당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육형제 모두 동의하고 재산을 정리합니다.

 

이회영의 동생 이석영은 한양 최대 갑부 이유원의 양자로 한양에 들어올 때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재력가였습니다.

 

이회영의 형제들이 보유했던 재산은 현재 시가로 2조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재산을 헐값에 매각해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일주일에 세 끼를 먹으면 잘 먹었다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고, 대부호였던 이석영은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습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때거리는 부족했다. 삼시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 준비를 위해 어느 때는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 거리가 없어서 간장과 파만 넣었다. 양식이 없던 어느 해는 좁쌀도 없어 뜬 좁쌀로 밥을 해먹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서간도의 추위는 참으로 엄청나다. 공기도 쨍하게 얼어붙어 어떤 날은 해도 안 보이고 온 천지에 눈서리만 자욱하다. 하늘과 땅 사이엔 오로지 매서운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돔’이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할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께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 (허은 지사 회고록 중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은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구할 수 없어, 빈민가에 버려진 야채를 줍거나,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해 살았습니다.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는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폐렴까지 걸려 고생하다가 겨우 병원에 입원하지만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임종 직전 남편인 백범을 부르려고 했지만, 최 여사는 만류했습니다.

 

당시 백범 선생은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합니다. 일제 경찰이 그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의 삶까지도 모두 희생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일제 불매운동을 가리켜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가난한 생활과 고문,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저항운동을 조금이나마 잇겠다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독립운동보다 일제 불매운동이 쉬운 이유(https://youtu.be/ZtAC0OfkH9Q)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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